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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1 11:23

올여름 유난히 비가 자주 오네요. 저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비를 좋아하는 편인데, 비가 오면 커피 한 잔만 있어도 한껏 감수성에 젖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실 저 역시 학창시절엔 남 못지않은 문학 청년이었거든요.^^ 요즘도 가끔 비 오는 날에는 시집을 들춰보는데, 며칠 전에는 김수영 시집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대학 시절에 재미있게 읽은 시인데, 그때는 '금성'이라는 브랜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궁금증이 발동해서 제가 아는 소설이나 시에 '금성'이나 'LG' 브랜드명이 나타난 작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제법 눈에 띄더군요. ^^

시인 김수영이 노래한 금성 라디오, A-504

명랑하지 않던 시대에 명랑한 날을 꿈꾸며

금성라디오 A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500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 김수영,〈금성 라디오>(1966),《김수영 전집》(민음사, 2003) 中

LG의 전신이기도 한 금성사는 1951년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을 생산했는데요. A-504는 그 후속 제품입니다. 원래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는 라디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치품 단속' 목록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정부 정책과 뉴스 전달 수단으로 라디오를 새로 보기 시작했고, '농촌 라디오 보내기', '1가정 1라디오', '전자제품 국산화' 정책에 힘입어 급속도로 라디오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조금 다르게 라디오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는 신문과 잡지를 빼면 별다른 오락 도구가 없던 시절인지라, 국민은 라디오를 통해 당대 명가수의 노래와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울고 웃으며 전후 상실감과 시대적 불안감을 달랬던 것이지요. 그러니, 1959년 신문광고에 나왔다는 "명랑한 가정마다 금성 라듸오"라는 헤드카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러기에, '명랑하지 않은 시대에 명랑한 시대를 꿈꾸며' 시인도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고 괴로워 했었겠지요.
 (LG전자 역사관 <그때 그 광고> 참조)

시인 장석남이 노래한 금성 라디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1995년 장석남 시인이 다시 한 번 금성 라디오를 노래합니다.  제가 가장 멋진 책 제목으로 꼽는《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에서 말이죠.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드뷔시의
기상 개황 시간
나는 툇마루 끝에 앉아서
파고 이 내지 삼 미터에
귀를 씻고 있다
萬頃蒼波
노을에
말을 삼킨
발자국이 나 있다
술 마시러 갔을까
너 어디 갔니
로케트 건전지 위에 결박 지은
금성 라디오
한번 때려 끄고
허리를 돌려
등뼈를 푼다
가고 싶은
격렬비열도

(요즘 라라 크래커는 왜 안나오지?)

- 장석남,〈격렬비열도>,《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中

이 비장한 이름의 섬은 충청남도 태안군에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랍니다. 시인의 고향은 서해 덕적도고요. 그러고 보면, 시 속의 장면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저무는 노을 밑 치는 파도와 마주 앉은 시인, 로켓 건전지에 칭칭 동여맨 금성 라디오 하나만이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면 말이지요. 김수영 시인의 고백처럼 괴롭지는 않지만, '가고 싶은 격렬비열도'라는 구절이 왠지 뭉클하게 다가오네요. 생각해 보면 그즈음 시골에 가면 정말 로케트 건전지에 동동 동여매어진 금성 라디오가 오래전 분가한 막내 삼촌 방 흙벽 밑에 놓여 있곤 했습니다.

시인 강영은이 노래한 LG 세탁기
내친 김에, 다른 가전제품에 관한 시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있네요. 트롬 세탁기에 관한 시 한 편입니다.


'하느님도 가끔은 지구라는 통을 통째로 돌리신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우레•번개가 칠 때
벼락과 함께 땅에 떨어져 수목을 찢어놓고 사람과 가축을 해친다는
뇌수 한 마리, 우리 집 세탁실로 들어왔다
들어온 날부터 외눈박이 눈을 부라리더니
남편을 삼키고 나를 삼키고 아이들을 집어 삼킨다
소용돌이치는 220볼트, 쇠 이빨이
뒤따라온 골목길과 먼지 묻은 발자국을 지워나간다
열대성 호우 쏟아지는 내장 속에서
술 취한 바지와 가리지날 꽃무늬 원피스가 엉켜 붙는다
시너지효과만 주절대는 팬티와 브라자, 쌍방울표
메리야스는 멀티 오르가즘을 탐색하다 빈혈을 일으킨다
게임기에 빠진 모자와 양말이 게임 속도를 높인다
천상의 속도와 지상의 속도가 맞붙자
괄약근을 조이는 세상이 쿨럭거리며 구정물을 쏟아낸다
잃어버린 낙원이 물기 하나 없이 탈수 된다

우리 아직 살아 있지?
햇빛 좋은 베란다에 환골탈태한 감색 바지와 꽃무늬 원피스
높이가 다른 모자와 양말이 나란히 널린다
거꾸로 보는 하늘이 파랗다

하느님도 가끔은 지구라는 통을 통째로 돌리신다

-강영은,〈트롬세탁기에 관한 보고서>,《시에》2009 여름호 中 

앞선 두 편의 시에 비해 표현이 강하지요? 그런데, 사실 여러 시인의 시를 읽는 재미가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시인마다 사물을 대하는 표현 방식이 모두 다르니까요. 어쨌거나, 세탁기는 20여 년 전쯤만 해도 딸을 출가시키는 우리네 어머니들에게는 가장 많은 사연을 준 가전제품이었는데요. 당신은 평생 손빨래를 하더라도 딸에게만은 세탁기를 안되면 짤순이(탈수기)라도 혼수로 장만해주고 싶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 그 덕에 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비가 자주 오는 여름이 그다지 눅눅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저희 집에서는 트롬의 건조기능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ㅋ~^^)

위에 소개하지 않은 LG전자의 브랜드와 제품들이 등장한 문학작품들을 두 개 더 소개하겠습니다.

박해림 시, 〈금성 라디오〉 - 《고요, 혹은 떨림》(고요아침, 2004)
김하인 소설, 《내 마음의 풍금소리》(생각의나무, 2002)

혹시 이 밖에도 LG를 노래한 문학 작품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

Writer(guest)

서영석 과장(석K)
은  국문학도 출신으로 정보통신 취재기자 생활로 직장 첫걸음을 디딘 이후, 현재 한국지역본부 Brand Communication팀에서 브랜드 사이트 및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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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묘실 2009/08/21 11:27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시랑 연결시킨게, 좋네요

    • 엘진 2009/08/21 21:25 address / modify or delete

      의의로 여러 작품이 있죠?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제품이라 시에도 곧잘 등장하는거 같아요.

  2. 라디오키즈 2009/08/21 15:07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시대와 함께 한다는 건 이래서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그저 추억의 물건으로 잊혀지는게 아니라 이렇게 시로, 가슴 속의 기억으로 남는군요.^^ 멋지네요.

    • 엘진 2009/08/21 16:38 address / modify or delete

      라디오키즈님도 은근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이니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시나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더 자주 들려드리도록 해볼께요 ^^ 9월에는 뵐수 있겠죠?

  3. 낭만고양이 2009/08/21 15:41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누군가에게 추억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죠..
    더우기 詩속에 활자로 남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겠죠.
    앞으로도 사람들의 기억속에,詩속에 더욱 많은 추억을 남기는 LG전자가 되었슴 합니다.

    • 석K 2009/08/21 16:41 address / modify or delete

      추억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낭만고양이님의 응원에 꾸벅 감사드립니다. (--)(__)

  4. 月下 2009/08/21 15:56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재미있네요. 전자 제품과 '시' 라.. 갑자기 예전 LG 에서 했던 광고가 생각나네요. 세계 명화 속의 LG 였나... 문학과 전자제품.. 정말 안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그 문학작품을 만드시는 분들도 전자제품을 사용하고 있을 터이니.. (뭐가 논리가 이상하다는.. ㅎㅎㅎ)

    • 엘진 2009/08/21 16:37 address / modify or delete

      월하님 보신게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LG의 기업이미지 명화 편으로 유수의 광고상을 휩쓸었더군요.
      후속 편이 저희 블로그에 소개해드린 자전거랍니다. ^^
      http://blog.lge.com/123

  5. 로미오 2009/08/21 16:01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어릴적 생각이 많이 나네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늘 옆두고 들어시던 라디오...
    그땐 신기하기도 했었는데.....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 석K 2009/08/21 16:40 address / modify or delete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로미오님과 할아버님 사이에는 라디오가 자리 잡은 듯합니다. 왠지 옛노래가 흐르는 라디오가 듣고 싶은 오후네요. ^^;;

  6. 뽀미 2009/08/21 16:06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전자제품에도 추억이 묻어져있고, 세월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는게 참 신기하네요 ^^

    • 엘진 2009/08/21 21:48 address / modify or delete

      비록 기계이더라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면 그 자체가 추억이 될수 있는거겠죠.^^

  7. 타임라인 2009/08/21 16:10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저희 집에는 아직까지 금성 TV가 남아있습니다. 어렸을때는 거실에 있던 티비 였지만, 지금은 안방의 서브 티비로 애용되고 있습니다. ㅎㅎ 신기한건 오히려 더 늦게 산 티비들은 망가져서 교체하였지만, 금성 티비는 아직까지 멀쩡하네요. 얼추 계산해 보니 86년도쯤 구매한 듯~?

    과장님 글을 읽으니 문득 저희집 금성 티비가 보고 싶네요. 오늘 집에 가서 먼지라도 한번 털어줘야 겠습니다~~ ㅎㅎ

    • 석K 2009/08/21 16:45 address / modify or delete

      우와 그럼 지금쯤 그 금성TV의 나이가.. 24살이네요. 기특하다고 토닥토닥 먼지를 털어주시면 아마 무척 좋아할 듯합니다. 타임라인님의 감성적인 글에 가슴 뭉클했답니다. ^^;;

  8. 뮬란 2009/08/21 16:15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윗분들 말씀 처럼 문학과 전자제품의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것들의 조합이 참 이체롭내요!ㅎ
    차가운 가전들도 우리들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하니 따뜻한 시가 되내요~^^

    • 석K 2009/08/21 16:47 address / modify or delete

      뮬란님의 표현! 가전의 차가움이 아련한 추억과 만나 따뜻함으로 변한다는 직관이 한편의 시같습니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조합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같습니다. ^^*

  9. 수잔나 2009/08/21 16:20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괄약근을 조이는 세상이 쿨럭거리며 구정물을 쏟아낸다"라는 말이 참...
    암놈인지 숫놈인지 수술 시켜드려야겠네여..

    • 석K 2009/08/21 16:49 address / modify or delete

      수잔나님의 재치에 잠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생각의 경계는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는 듯합니다. 공감이 가면서도 일상적이지 않은 발상에서, 사물의 진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요? ^..^

  10. suisho 2009/08/21 16:25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세탁기 광고를 시로 코믹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시험기간 친구들과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모여 앉아 라디오로 "별밤"을 듣던 추억이 새록 새록..
    20살 정도 먹은 우리집 고장난 세탁기 때문에 약하게 찌릿찌릿 감전되었던 적이 있는데
    뜰수 있는 만큼 크게 토끼눈을하고 매장에 달려들어가 한눈에 보이는 트롬으로 바로 바꿨던 것이 생각나네요.

    • 엘진 2009/08/22 04:20 address / modify or delete

      광고에 접목하는 것도 재밌겠군요 ㅋ '별밤'은 라디오라는 매개를 통해 누구에게나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것 같아요. suisho님도 금성 라디오와 LG트롬을 사용하셨군요 ㅋ

  11. hj 2009/08/23 17:36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와..세상에 LG전자제품들로 시를...첨알았어여.suisho님 말처럼 광고에 접목하는것도 좋은듯여.
    세탁기 글중에 "소용돌이치는 220볼트, 쇠 이빨이 뒤따라온 골목길과 먼지 묻은 발자국을 지워나간다"이부분 나름 위트도 있는듯여.저도 꼭 찾아볼게여.시이외에 다른 문학작품에도 있는지 궁금하네여~!

    • 엘진 2009/08/24 09:12 address / modify or delete

      안녕하세요. hj님~^^
      다른 작품에서도 LG관련 이야기를 찾아내면 제일 먼저 여기에 오셔서 알려주시길 바랄게요~

  12. hera 2009/08/24 13:09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정말재밋네요.
    김수영님은 제가 참 좋아하는 분인데요. 이런 시가 있는지는 또 몰랐어요~
    우리집에도 있었던 금성라디오 ^^
    옛날에 금성 라디오는 왠지 고유명사 처럼 들리네요. ^^

    (근데저에겐 엑스박스들이 보입니다 ㅠ_ㅠ)

    • 석K 2009/08/24 13:24 address / modify or delete

      김수영님이 금성라디오를 통해 그시대 그 당시의 시간대를 표현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헤라님의 말씀처럼 고유명사로 인식될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문화>를 만드는 것처럼 뜻있는 일이겠죠?
      우리네 문학과 가전제품의 만남! 그 속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13. 나는 2009/09/05 03:01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lg 관계자 분들께

    금성 옛날 라디오 리메이크 하실생각은 없는지요
    라디오 만든지가 50년이라면서요
    지금 디지로그시대 라고들 하자나요
    라디오 뿐만이 아니고 다른가전제품들도 괜찮을듯합니다
    꼭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4. juststar 2009/09/14 10:00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클래식 라디오는 사람들에게 묘한 매력이 있는거 같아요 ^^
    요즘도 클래식 라디오는 고가의 제품이 출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소장의 가치를 느끼고 있죠.
    tv와 internet에 자리를 빼앗길줄 알았는데.
    아직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사람의 정겨운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곤 합니다.

    저도 비록 멋진 라디오는 아니지만. 주말 아침 라디오 DJ가 선곡한 멋진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 하곤 합니다.
    LG전자 에서 이전의 클래식한 모델을 생산해도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스테디셀러는 될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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